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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깜이 / 김영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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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혁 기자  | 작성 22-01-25 17:55  |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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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깜이

 김영희 / 시인

 

1960년대, 가난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50여 호 모여 있는 내가 살던 작은 농촌 동네엔 아이들은 많았지만 학교에 다니며 공부할 수 있는 아이들은 몇 안 됐었다. 

여남은 살만 되면 호미 하나씩 들고 밭으로 나가는 아이들과, 소를 먹이러 들로 나가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중 나하고 동갑내기였던 아이가 해깜이다.

햇간이라 불리던 친구를 나만 유독 해깜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호적에 등재된 이름은 도무지 누구도 부르지 않았다. 

해깜이네 형제자매는 열한 명이나 된다. 

가난한 살림에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장날 저녁이면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살림살이가 마당으로 내던져 부서지곤 했었다.

언제부터인가 해깜이네는 동네에서 회자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해깜이 소식이 궁금하여 수소문도 해보았지만 고향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아련한 옛 기억 속에 호미 하나 들고 마당 바닥에다 자기 이름은 어떻게 쓰는 거냐고 한 번 써보라던 갸름한 얼굴만 기억해야 했다.


 해깜이 소식을 친구가 가지고 왔다. 

원주 근교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50여 년이 지나 만난 해깜이. 

예전처럼 자그마했지만 야무지게 살아온 모습이 집안 곳곳에 가득가득 담겨있었다.

제 이름자도 깨우치지 못한 해깜이는 열여섯 살에 가난을 벗어내려고 가출을 했단다. 

무작정 밤기차를 타고 불빛이 많은 것을 보고 내린 곳이 어딘지도 몰랐던 원주역이었다고 한다. 

남의 집 식모살이도 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한 남자를 만나 억척스레 살림을 일궜다 한다. 

목표였던 경제적 부를 이루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못 배운 한은 남아있다지만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알뜰하고 지혜롭게 살아온 해깜이. 

반듯한 전원주택과 넓은 농토에서 계약재배를 하는 농가는 편안하고 한갓진, 어린 시절 해깜이네 살림살이와는 연결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자녀도 셋을 낳아 대학원까지 뒷바라지를 해서 사회의 일원으로 제 몫을 한다고 한다. 

가방 들고 학교 다니던 내가 부럽기만 했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가난의 굴레를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는 무엇보다도 찬란하게 해깜이를 채우고 있었다.


  자신이 설계한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는 것 같다. 

시대적으로는 베이비부머 시대의 희생양이고, 가정적으로는 가난한 집 딸로서의 희생양이었던 해깜이는 스스로 설계한 인생 승리자다.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늘그막에 한글은 깨우쳤다고 배시시 웃는 모습이 투명했다. 

살아오면서 체험으로 얻어낸 지혜가 남보다 뛰어난 해깜이는 부족함이 없는 여성이고, 아내이고, 어머니다. 

부모가 깔아주는 프로그램은 지속가능성이 약하다. 

부모가 설계한 생을 살다 보면 진정한 인생관을 세우지 못해 자꾸만 바꾸어가면서 기웃대는 삶을 살게 된다. 

결국은 그 무엇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해깜이를 통해 또 한 번 생각을 키우는 요즘이다.

어려운 환경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 사람들은 무진장 많다. 

반면 누군가를 탓하면서 시간만 보내버린 안타까운 사람들도 종종 있다. 

3포 세대라는 말이 10여 년 전에 등장하더니 이젠 10포 세대라는 이른바 N 포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우리 모두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하는 단어들이다.

이 많은 농토를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질문에 해깜이는 말한다.

몸이 고달픈 것은 고통이 아니다. 

몸을 움직여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게으르고 포기가 빨랐던 부모님 덕에 마음이 고통을 당했다. 

배고픈 건 견딜 수 있었지만 가난이 주는 불편함은 견디기 싫었다고. 

하여 한 번뿐인 생인데 나의 꽃은 내 힘으로 활짝 피우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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